[북리뷰] 『미루나무』: 그리움을 먹고 자란 줄기와 추억이라는 이름의 가지

Read & Do

[북리뷰] 『미루나무』: 그리움을 먹고 자란 줄기와 추억이라는 이름의 가지

2nddrawer 2022. 2. 13. 12:23
728x90

한국인만큼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도 드물다. 노인 세대는 전쟁과 가난을 직접적으로 겪었고, 60대만 해도 어렸을 때 전기가 마을에 처음 들어온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 많다. 나 같은 30대 후반만 해도 초등학교 때 삐삐를 처음 접했고 청소년기 때가 되서야 핸드폰을 가질 수 있었으며, 군대에 갔다 오니 스마트폰이라는 게 생겨 신기해 했던 경험이 있다.

 

이렇게 큰 변화를 겪으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치이며 고단한 삶을 살게 될 수밖에 없었다.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지쳤다고 느끼는 순간에, 지금보다는 불편하고 부족했지만 한편으로는 여유롭고 넉넉했던 지난 날을 떠올리곤 한다. 그 생각의 끝에는 예전의 억세고 든든했던, 그리고 사무치게 그리운 부모님의 모습이 겹쳐질 것이다.

 

『미루나무』 (이영옥 지음, 소담북스)

 

책 『미루나무』는 어린 시절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전체 내용을 관통하고 있다. 너무나도 많이 바뀌었을 고향 마을과 이제는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는 부모님,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는 기억을, 작가는 책을 통해 붙잡아 내고 있다.

 

밭뚝으로 잡초 뽑아 던지는 게 일상이었던 보리밭의 어머니.
벌떼 웅웅거리는 유채꽃 사이 삼동초 몇 개 베어가는 아버지.
하얀 향기 그득한 앵두나무 밑에서 조는 듯 앉아 있는 닭들.

p.22, 그리운 것들
아리하게 그려지는 어린 시절도, 허구헌날 막혀버린 수챗구멍을 뚫던 목덜미 까맣게 그을린 아버지도, 걸음 빠르시던 어머니도, 초라한 고향집은 기억 속에만 살아 있다. 이 소중한 기억들이 가끔은 잔잔한 미소를 선물하고 때론 가슴 덥혀주는 소중한 보석들이다.

p.34, 옥수깽이 여물던 밤

 

이 책은 이러한 유년 시절의 기억들을 에피소드 형태로 풀어내고 있다. 때로는 행복하고 즐거웠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,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하고 아팠던 기억이 함께 펼쳐진다. 이렇게 각각의 에피소드에는 소소한 추억들이 가지를 이루고, 이 추억의 가지들은 하나 둘 모여 아련한 그리움을 담은 한 그루의 나무처럼 보인다. 

 

소죽솥에 여물 익는 냄새 퍼져 나오면 누렁이의 배고픈 울음도 더욱 잦아진다. 밤이슬 소리 없이 내려앉은 바람 냄새 밴 빨래를 걷어들일 쯤 외양간 옆에 깔 부리는 아버지 소리가 들린다. 먼지 내며 수수빗자루로 토방 쓰는 아이 뒤에서 엄마는 '얼라, 우리 딸덜이 밥 다 해놨네' 칭찬과 고마움의 뜻이 함축된 한 마디 던지신다.

p.75, 빨래터
저만큼 뒤에서 걸진 목소리로 어머니가 날 불렀지만 그 소리를 외면하며 잰걸음으로 앞만 보고 걸었다. 친구들이 볼까 봐서.
(중략)
예민한 사춘기였던 나는 그렇게 어머니를 외면하고 집에 도착해서 청소, 빨래, 소밥 주기, 저녁 짓기 등 늘 어머니가 하시던 일을 서둘러 하기 시작한다. 죄스러움에 배고픔도 잊었다.
"엄마가 불르는 소리 안 들리담?"
"안 들리던디?"
(중략) 치부책을 넘겨 무엇인가 열심히 적는 어머니 손에는 이빨자욱 선명한 분홍색 몽당연필이 들려있다. 자식들이 쓰다 버린 색바래고 짧아진 몽당연필이다.
순간, 자책의 눈물에 어머니 모습 희미하게 보이고 마당 쓸던 수수빗자루 쥔 손만 바빠진다.

p.24, 유년의 상처

 

한편,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미루나무는 내용 중에서 비중이 크지 않다. 다만, 책 내용에 미루어 볼 때 집 근처에 미루나무가 집에 가까이 있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. 미루나무는 에피소드에 종종 등장해 작가가 펼쳐 놓은 추억의 한 귀퉁이에 말없이 서 있다.

 

지장골 입구 멀대처럼 지키고 서 있던 미루나무를 지나면 천정 낮은 우리 집이 있다. 우리는 그 집에서 눈부신 아침의 태양과 소리 없이 지면서도 무언의 몸짓으로 자신의 모습을 붉게 드러내던 저녁노을을 보며 자라났다.

p.97, 호박고구마
경운기 지나는 소리, 워~어이 참새 쫓는 소리, 깔깔대는 계집아이들 소리, 벼 이삭 부대는 소리, 뽕나무에서 아침부터 울어대는 처서매미 소리들이 한데 어우러져 밭둑에 기다랗게 서있는 미루나무 가지에 걸렸다.

p.65, 배추씨 뿌리던 날

 

책 후반부에는 작가의 유년 시절이 아닌, 최근 시점의 이야기 두어 개가 툭 튀어나와 있다. 예전과는 다르게 성치 않은 부모님과 그만큼 내려앉아 버린 고향집에 작가 역시 무너져내린다. 앞서 잔잔하게 이어져 온 다른 에피소드와는 달리 감정이 격하다. 참다 참다 끝내 터진 울음처럼.

 

주저앉은 채 빗자루로 방 쓰는 일 외엔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도 그래도 마음 편한 내 집이 좋으신가 보다. 성치 못한 두 분을 성치 못한 집에 두고 집에 돌아왔다. 두어 달 가까이 어머니가 앉아 계셨던 그 자리엔 어머니 즐겨 보시던 요리책과 사진첩만 가지런히 놓여있다. 화장실 옆 흰 벽엔 줄을 그어 놓은 듯 어머니 손자국에 누렇게 나있다. 순간 끓어오르는 알 수 없는 북받침이 일었다. 어머니가 앉아 계시던 소파에 스러져 엉엉 소리 내어 한참을 울었다.

p.161, 어머니 손자국
반주로 드시라고 냉장고 야채 박스 속에 넣어 둔 소주 병에 기쁨을 감추지 못해 희멀건 웃음 자꾸 웃으신다. 맨발로 반겨 주시더니 맨발로 서서 안 보일 때까지 손 흔들어 배웅해주신다.
눈앞이 자꾸 흐려온다.

p.189, 아버지의 맨발

 


 

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이 있다. 대부분 모두 비슷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그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고 싶어 한다. 그래야 이제는 닿을 수 없는, 사랑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 모르기 때문이다. 작가도 그러한 마음에서 이 책을 시작했으리라 본다.

 

넉넉하진 못했지만 포근했던 시절, 부모님의 작은 몸짓 하나, 말씀 하나, 함께 먹던 음식까지 천정 낮던 집과 내가 자란 지장골의 기록을 오롯이 담았다. 어린아이 시선으로 바라본 어릴 적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내 놓는 거라 조심스럽고 한편으론 부끄럽기도 하다.

p8, 책머리에

 

728x90